《남아 있는 나날》, 일을 다 마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스티븐스는 평생 좋은 집사로 사는 법을 배웠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주인의 체면을 지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맡은 일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어느 날 아버지가 위층에서 죽어 가는 동안에도 그는 아래층 손님들을 응대한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자리를 지킨다.
그 장면이 오래 불편하다. 냉정해서라기보다 너무 익숙해서 그렇다.
급한 보고서를 끝내고 휴대폰을 열었는데 가족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떠 있는 저녁, 몸이 아픈 사람에게 “이번 주만 지나고 보자”고 말해 놓고 또 다음 주를 맞는 일. 중요한 것을 모르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늘 먼저였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 순서가 삶 전체가 되어 버린다.
스티븐스 곁에는 미스 켄턴도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조금만 더 들여다봤다면 다른 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언제나 집사였고 그녀 앞에서도 그 역할을 벗지 못한다. 사람 사이의 감정은 꼭 큰 사건 때문에 멀어지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느라 말 한마디를 미루고, 다음에 하자고 넘긴 저녁들이 쌓여 어느새 돌아가기 어려운 거리가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제목이 조금 서늘하다. 앞으로 남은 날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미 지나가 버린 날들을 자꾸 돌아보게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정말 내 시간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늘 그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마지막 순서에 놓고 사는 걸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 1989
L.K. 티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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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1989년에 발표한 소설로, 평생 영국 대저택의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가 여행길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 때문에 감정과 관계를 뒤로 미뤄 온 한 사람이, 미스 켄턴과의 기억을 되짚으며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절제된 문체로 후회, 책임, 사랑,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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