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변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의 원폭과 항복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군에 독립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레오팝
2025. 5. 20. 23:53
[아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했지만 가상의 주관적 시나리오임을 알려드립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 정통성 확보
✅ 실제 역사
-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중국에서 망명정부로 활동했지만, 해방 후 미국은 신탁통치·군정 체제를 택하며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가상 시나리오
-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무장 해방 주체로 참전했다면, 국제사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실질적인 해방 주체, 국가 수립의 정통성 주체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이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임시정부를 승계하는 형태의 ‘제헌 정부’가 아니라 곧바로 ‘법통 계승 정부’가 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 미소 냉전 구도 속 한반도 분단 방식 변화
✅ 실제 역사
- 미국은 일본 패망 직후 한반도를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 제안했고, 소련은 수용했습니다.
- 그 결과 남북 분단과 두 개의 정부 수립(1948)으로 이어졌습니다.
✅ 가상 시나리오
- 만약 광복군이 북한 지역까지 해방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면,
소련군의 일방적 진입 명분은 약화되고, 한반도 전체에서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정부 수립 가능성이 더 커졌을 수 있습니다. - 특히, 광복군이 북한까지 진입해 항일 세력과 협력했다면,
조선 내 좌우 합작 체제가 더 유리하게 논의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3. 일본 전범 처리와 전후 청산 방식 변화
✅ 실제 역사
- 일본은 원폭 투하 후 무조건 항복했고, 전범 처리는 연합국이 주도(특히 미국 중심)했습니다.
한국은 피점령국이 아닌 ‘일본의 부속지’로 간주되어 전범국 청산과정에서 소외되었습니다.
✅ 가상 시나리오
- 광복군이 무력 해방에 기여했다면, 한국은 명백한 ‘연합국 일원’으로서 전후 처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 이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문제, 강제징용·위안부 등 전쟁범죄에 대한 공식 책임 추궁이 훨씬 강하게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보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문제해결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4. 군사·외교적 자주권 강화와 조기 독립
- 미군 단독 점령이 아닌 연합군 공동작전이었다면,
→ 한반도 군정 체제는 미군 단독 군정이 아닌, 국제 연합군 혹은 한국 주도 체제로 전개되었을 수 있습니다. - 그 결과 독립 준비 과정에서 외세 개입이 줄고, 대한민국 건국이 더 자주적인 형태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 민족 내부의 권력 주도 세력 변화
- 실제 역사에서는, 해방 직후 미군정 하에서 친일 세력이 잔존하거나 친미 인사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 그러나 광복군과 임시정부가 직접 한반도 해방에 기여했다면,
항일 무장투쟁 중심의 인물들이 국가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 이승만 중심이 아닌, 김구·조소앙·김원봉 등의 세력이 권력의 중심축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행정·경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협력한 친일관료·경찰·군인들을 대거 재등용했습니다.
- 그 결과 친일 청산은 실패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정의·사회갈등의 핵심 뿌리가 되었습니다.
✅ 만약 광복군/임시정부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면
-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실질적으로 집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친일파 청산’은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과 도덕적 기반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며,
→ 정의로운 건국 서사가 오늘날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
- 조선경비대(국군의 전신), 경찰 등은 일본 헌병·군 출신 인물들이 주도했습니다.
- 이는 이후 군부 쿠데타(1961), 독재 정권 등장의 간접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 만약 광복군 출신이 주도했다면 항일 전통을 가진 군대와 경찰 조직이 대한민국의 안보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 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맥락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 민주적 통제 아래의 군 체계가 조기에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 4. 국민 통합과 민족 정체성 형성의 방향성 변화
✅ 실제 역사
-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 세력이 해방 이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되면서,
→ 민족 서사는 단절되었고, 정치·역사 교육은 국가주의적·반공 이데올로기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 광복군 주도의 국가였다면
- 민족 독립의 서사와 항일 정신이 헌법과 교육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 국민통합의 기반이 ‘반공’이 아니라 ‘항일과 자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는 남북 분단 이후에도, 남한의 정체성이 더 자주적이고 도덕적 권위를 갖는 방향으로 확립되었을 것입니다.
🔹 5. 현대사 논쟁의 축소 가능성
- 지금도 한국 사회는 친일청산 실패, 독재정권 미화, 역사 교과서 논쟁, 독립운동 세력 폄하 등으로 정치적 갈등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정통성 있는 항일세력이 국가를 수립했다면,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역사적 갈등과 정당성 논쟁이 상당 부분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물론 광복군이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이 해방의 주체가 되고, 우리의 역사가 다른 길을 걸었다면 앞서 논의한 것처럼 긍정적인 측면 외 또 다른 문제점들도 있었을 겁니다. 미군과의 관계문제, 러시아,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 등이 새로운 갈등 요소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도하여 이룬 독립은 무엇보다 값진 역사의 성과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 물론 저의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은 단순히 가상의 시나리오로 작성한 것이니 별도의 역사적 해석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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