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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가장한 수다

『호밀밭의 파수꾼』 – 벼랑 끝에서 지키고 싶은 마음, 그리고 외로움의 언어

by 레오팝 2025. 5. 6.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을 다시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야기보다 ‘목소리’였다. 작중 화자인 홀든 콜필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밀쳐내며, 동시에 애타게 연결을 원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청소년기의 방황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인간의 초상이다. 그리고 그 고립은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홀든은 자신이 퇴학당한 학교를 나와 뉴욕을 배회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여자 친구, 택시 기사, 선생님, 가족—모두와 대화를 나누지만, 진심 어린 연결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다 엉터리야(phoney). 가짜 같아. 진짜인 척하지만 전부 가식뿐이야.”
이 문장은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중심 감정이자, 홀든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다. 단순한 반항이나 청소년기의 특성으로만 치부하기엔, 그의 감정은 너무 날것이고 절박하다. 그는 세상의 위선을 보고 있고, 그 위선 속에 자신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장면은 동생 피비와의 대화에서 나온다.
“내가 진짜 되고 싶은 건, 호밀밭에서 노는 애들이 벼랑 끝으로 떨어지기 전에 잡아주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냥 거기 서서 애들이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거야.”
이 장면에서 홀든은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선명한 이미지로 말한다. 그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자라난다는 것은 세상의 규칙에 순응하고, 때로는 자신을 속여야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이 무너지기 전에, 벼랑 끝에서 그들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미 벼랑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다.

 

홀든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데 민감하다. 연극을 보고도, 배우들의 과장된 감정에 신물이 난다고 말한다. 택시 기사에게 오리들은 겨울이면 어디로 가냐고 묻는 장면에서는, 어른들이 대체로 외면하는 소소한 질문을 진지하게 품는다.
“그 오리들 말이야, 겨울이면 센트럴파크에서 어디로 가는 거야?”
이 질문은 단지 철새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다. 홀든은 어디론가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묻고 있다. 자신도 이 세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의식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의 모든 말에는 어딘가 어긋난 정서가 숨어 있지만, 그 어긋남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가 그토록 자주 떠올리는 건 과거다. 죽은 동생 앨리, 어린 시절의 기억, 변하지 않는 박물관. 특히 박물관 장면은 인상적이다.
“박물관은 변하지 않아. 전시물도, 공간도 그대로야. 다만 내가 변해 있을 뿐이지.”
그는 변하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그리고 그 안도는 곧 현실의 불안과 마주하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가 항상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변화란 곧 상실이며, 누군가에게는 그 상실이 두려움이다. 홀든은 그래서 머무르고 싶어 하고, 멈춰 있는 공간을 동경한다.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강력한 공명을 주는 이유는, 홀든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시대를 대표하는 십대가 아니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감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SNS 시대의 젊은이들 또한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로를 느낀다. 좋아요 수에 감정이 휘둘리고, 진심보다 이미지가 먼저 평가받는다. 그 런 세상에서 홀든의 언어는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린다. 그는 외친다. “가짜는 싫어.” 단호하지만, 그 말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섞여 있다. 누군가에게 속지 않기 위해 먼저 밀쳐내는 방어의 말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에서 홀든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치료 후 다시 학교에 다닐 예정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결심은 단단하지 않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고 조용히 말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도 해.”
홀든은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이야기를 마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가장 솔직한 모습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른이 되었다고 믿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누군가 붙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건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인 고독이고,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 서사이기를 거부한 드문 소설이다. 흔히 말하는 ‘극복’이나 ‘교훈’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놓인 건 무너짐과 흔들림, 그리고 그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그건 문학의 본령이기도 하다.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말하게 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외로움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 이 책은 그것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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