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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변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살아계셨다면...

by 레오팝 2025. 3. 16.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무사히 탈출했다면, 역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상상해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역사를 더 사랑하고 싶어서요...


1. 안중근의 지속적인 항일 활동 및 의열투쟁 확산

안중근이 체포되지 않고 탈출했다면, 그는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중근은 단순한 저격수가 아니라,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고 대규모 독립운동을 구상한 사상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살아남았다면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 의병전쟁 및 무장독립운동 강화
    안중근이 탈출 후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을 조직했다면, 무장 독립운동이 더 활성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후에 1910년대 이후 전개된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군 기지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의열단 활동의 촉진
    1910년대 후반 김원봉이 주도한 의열단과 같은 무력투쟁 노선이 더 빨리 조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1920년대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의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2. 국제적 반향과 일본의 대응 변화

  • 조선 병합(1910년) 연기 또는 변화 가능성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강경 노선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안중근이 탈출했다면, 일본은 조선 내 항일 운동을 더 강하게 탄압하거나, 반대로 병합 시점을 늦추고 회유 정책을 펼 가능성도 있습니다.
  • 국제 사회의 반응
    안중근이 살아남아 국제적으로 자신의 저격 이유와 동양 평화론을 설파할 기회를 가졌다면, 일본의 침략과 조선의 독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서구 열강이 일본의 조선 병합을 보다 신중히 바라보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3. 안중근 사상의 지속적 발전

안중근이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다면, 그의 ‘동양 평화론’이 보다 조직적인 형태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계 가능성
    만약 안중근이 1910년 이후까지 살아남아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면,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지도자로 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사상가였기 때문에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노선과의 관계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 내에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대립했는데, 안중근이 살아 있었다면 양 진영 간의 조율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는 유교적 가치관과 개혁적 사고를 함께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사상적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4. 일본의 대한 탄압 심화

  • 일본의 감시 및 보복 조치 강화
    안중근이 탈출했다면,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국내에서 독립운동 관련자에 대한 체포 및 처형이 늘어나면서 의병 세력의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 조선총독부의 강경책 강화
    일본은 1910년 이후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삼으면서 강력한 무단통치를 시행했지만, 안중근이 계속 활동했다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더욱 가혹한 식민 통치를 도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5.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

안중근의 생존은 단순한 독립운동의 연장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격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보다 조직적인 무장 투쟁이 조기에 활성화되었을 것이고, 국제적인 외교전을 더욱 강화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1920년대 만주 독립군과의 연결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거나, 독립군의 지도자로 활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세계 대전과 연계된 독립운동 전략 변화
    안중근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활동했다면,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이 더욱 강하게 주장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탈출했다면, 독립운동은 보다 조직적으로 성장하고, 국제적으로도 조선 독립 문제가 더욱 주목받았을 가능성이 크지지 않았을까 생각봅니다. 또한, 일본의 조선 병합이 일정 부분 영향을 받거나, 독립운동의 양상이 무장 투쟁 중심으로 더욱 강경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는 부작용도 예상할 수 있으며,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이 심화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우린 역사에 굴하지 않고 광복의 의지를 더욱 뚜력하게 남길수 있었을 테고, 그 영웅들이 함께 함에 우리 국민들은 더 큰 희망을 가지고 광복에 대한 염원을 키우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 내에서도 그의 정신과 행동을 존경하는 일본인이 아마도 더욱 많아지지 않았을까 생각봅니다. 

 

국내 역사관련 드라마나 영화는 정작 우리 역사의 주인공과 사건보다는 치정과 질투에 더 관심이 많았고 우리 역사의 인물보다는 타인의 인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때론 중증외상센터 같은 드라마 처럼 로맨스없는 사건 전개가 더 재미있는 것 처럼 그냥 우리역사의 진실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과거를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역사는 마치 배신과 치정만이 난무하는 역사를 그리는것이 왜 사실에 기인한것으로 이야기하고 마치 그것이 더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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